[시사뉴스 박웅준 칼럼니스트]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처럼 자신이 믿는 것을 성스럽게 만든다.”(프랑스 언어학자·철학자·종교사가·비평가 에르네스트 르낭, 1823-1892) 구불구불한 말티고개를 넘어 법주사로 가는 길에 정이품송을 봤다. 예전의 당당했던 모습은 간데없고 지지대에 힘겹게 의지해 있는 모습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고정된 것, 영원한 것이 없다는 부처님의 말씀을 대변하고 있는 듯 했다. 이 같은 무상(無常)의 범위 안에는 우리가 사는 이 세계도 포함되어 있음을 불교는 설한다. 지금은 많이 변한 모습이지만 초창기 법주사는 그것을 세속 사람들에게 보여 주기 위하여 만들어졌을 것으로 생각했다. 이번 답사는 그 흔적을 확인하고자 했는데 고목(古木)에서 그 첫 장면을 보게 된 것이다. ◇ 공경과 화목, 자비로운 유토피아 경내에 들어서자 금동미륵불상이 눈의 띈다. 현대에 만들어졌지만 이 사찰이 신라의 열렬한 미륵 신앙자였던 진표 율사와 제자 영심이 중흥시킨 미륵도량이라는 것을 강하게 인식시키려는 듯 크고 위압적이다. ‘미륵래시경(彌勒來時經)’에는 먼 미래에 도래할 미륵의 신장이 십육장(十六長)이라고 한다. 1장을 3m라고 하면 48m의
[박웅준 성보문화재 연구위원] 오랜만에 남한산성에 올라갔다. 예전에 비해 차도 많이 막히고 방문하는 사람도 많아 북적였다. 아마도 최근 흥행하는 영화 ‘남한산성’의 영향도 있으리라 생각된다. 필자 또한 영화를 관람하고 현장 답사를 하고픈 욕구가 생겼기 때문이다. 산성은 생각보다 넓고 험난했다. 이 정도라면 물자만 충분했어도 더 버틸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다면 어떻게 흘러갔을까. 삼전도의 굴욕을 면할 수 있었을까. 명나라와 함께 청을 무찌를 수 있었을까. 역사에 가정은 무의미하지만 나름대로 상상을 하면서 거닐다가 작년에 갔었던 만리장성이 떠올랐다. 40도를 넘나드는 폭염에 땀을 흘리며 올라가면서 이렇게 힘들게 쌓은 성이 왜 제 역할을 하지 못한 거야? 하고 의아해 했었다. 생각해 보니 지금의 만리장성은 대부분 명나라 때 축성한 것이고, 여진족인 청나라는 남한산성을 정복했듯이 만리장성을 넘어 중국을 지배한 것이다. 청나라는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 그 과정을 되짚어 봐야겠다. ■ 후금, 중국 진출 방해세력 견제위해 조선 침략 1616년 누르하치는 만주의 여진을 통일하고 후금을 세웠다. 후금은 임진왜란으로 국력이 약해진 명나라와 지속적인 전쟁을
[시사뉴스 박웅준 성보문화재연구위원] 고령에 도착하자 한참 온 비가 그치고 먹구름 사이로 해가 비추기 시작했다. 고분들은 산 위에 있었다. 비가 다시 오기 전에 고분군에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으로 발걸음을 서둘렀다. 아래선 몇 기만 보이던 고분들이 위로 가니 산 능선을 따라 끝없이 늘어서 있다. 오를수록 점점 더 거대한 봉분과 마주쳤고 뒤로는 고분의 행렬이 별처럼 늘어선다. 신라를 뛰어넘는 순장 규모철갑기마무사의 나라 ‘대가야’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경주를 묘사할 때 절과 탑을 별과 기러기 무리로 비유해서 ‘사사성장 탑탑안행(寺寺星張 塔塔雁行)’이라고 했는데 이 광경이야 말로 ‘분분성장 총총안행(墳墳星張 塚塚雁行, 무덤이 하늘의 별처럼 펼쳐져 있고 기러기 떼처럼 줄지어 있는)’인 모습이었다. 고분군은 축구장 111개의 넓이(81만4816㎡)에 무려 800여기의 무덤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비교적 큰 봉분은 번호가 매겨져 72호 무덤까지 정해져 있고 가장 큰 무덤은 47호분으로 직경이 49m이다. 44호와 45호 무덤도 직경이 30m에 달하는 큰 무덤인데 이곳에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각각 36명, 15명의 순장묘가 발견되었다. 순장자들은 남녀 구분 없이 묘주
[시사뉴스 박웅준 성보문화재연구위원] 늦여름의 세찬 호우를 뚫고 김해로 향했다. 이렇게 비가 많이 오면 답사하기 힘들지 않을까 걱정을 했지만 신기하게도 도착하자마자 비는 그치고 해가 간간이 비추는 좋은 조건이 되었다. 이후로도 이동 중에 비는 계속 내렸지만 답사를 하려고 밖을 나서면 거짓말처럼 비가 그치는 현상이 반복되었다. ‘내 조상님이 이번 가야지역 답사를 위해 돌봐주시는구나’라는 느낌이 여행 내내 떠나지 않았다. 어머니가 김해 김씨인 것을 감사하게 생각했다. 김씨와 허씨, 한때 맺어질 수 없던 사연 처음 간곳은 김수로왕릉과 그의 부인인 허왕옥의 능이었다. 가야의 태조이자 김씨의 40%을 차지하는 김해 김씨의 시조. 사실관계를 떠나서라도 한국인 10명중 1명은 김수로왕을 조상으로 한다. 허왕옥은 그의 초대 왕후로, 널리 알려졌듯이 수로왕과 혼인을 위해 바다를 건너 인도 아유타국에서 온 공주로 김해 허씨의 시조이다. 둘 사이에서는 10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 2명이 어머니 성인 허씨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두 성은 지금까지 동성동본이라 하여 결혼을 기피한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김수로왕이 서기199년에 돌아가시니 대궐 동북쪽 평지에 빈궁(殯